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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60년 전의 북한 글쓰기_인문

북한의 역사 1 - 10점
김성보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역사비평사


작년 북한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체제가 들어서는 격변을 겪었다. 이러한 사건은 남한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새로 수립될 김정은체제가 과연 얼마나 안정적일지, 기존의 선군정치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지, 혹여 북한이 붕괴나 하지 않을지 남한언론은 연일 무수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특히 김정일이 사망하는 시점은, 이미 이른바 중동의 민주화로 전세계 독재국가들이 민주주의에 무너져 내려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북한체제 내에 어떤 파열음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누구하 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욱 강력한 선군정치를 선포하며 단단하게 똘똘 뭉쳐 있다. 이러한 북한의 폐쇄적이고 강력한 일인지배체제가 어떻게 구축될 수 있었을까? 북한 지도부는 원래부터 세습제를 통해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했을까? 악한 지도부들 일부가, 북한주민이라는 선한 존재들을 착취하고 고혈을 빼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초부터 이런 체제를 구상해왔던 것일까? 그렇게 힘든 경제 상황에서도 어떻게 북한은 자신의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해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 북한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떼나 쓰는그런 불합리한 대상으로 치부하는 이상 이러한 의문은 풀리지 않을 것이며, 북한은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나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문을 꼭 닫아놓고 바깥에 나오지 않는 이웃을 그냥 모른척 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웃이 바로 아파트 아랫집이고 그 집에서 화재 같은 큰 사태가 발생하면 불가피하게 우리집도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모른척 할 것인가? 그렇다고 그들이 문을 닫고 안 열어준다고 경찰을 불러 문을 강제로 여는 것만이 바람직한 해결책일까? 어쩌면 문을 따는 순가 이웃은 더 극단적인 행동을 할지 모른다.

결국 남은 것은 이웃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런데 만나려는 사람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외려 그들을 떼쓰는 아이로만생각할 경우 과연 어느 것 하나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그가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는지를 아는 것일지 모른다. 북한의 역사, 그것도 지금의 김정은체제를 만들어낸 직접적 출발점인 1945년 해방 이후의 북한의 현대사를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시중에는 북한의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다룬 책이 거의 전무하다. 6.25전쟁과 레드콤플렉스가 만연한 남한사회에서, 어쩌면 북한 역사 자체를 그대로 서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 한국 현대사의 북한 연구 성과를 종합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1960년대 김일성 사망시까지 다룬 이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웠다.

특히해방 이후 북한사회는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역동적인 사회였음을 인민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저자는 잘 보여준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 형성기를 획일화와 다원화의 두가지 힘이 당시에는 공존했으며 6.25전까지는 다원화의 힘이 더 강력하게 북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다원화의 인민민주주의단계를 좀더 지속적으로 그것도 철저하게 겪었다면, 지금의 북한사회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민주주의라는 다원화의 경험은 매우 짧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 연합한 남한과의 전쟁, 이후 계속되는 냉전 하에서 지속되는 외적 불안은 내적 안정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동했고, 결국 획일화의 힘이 더욱 강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 북한은 농업 협동화사회주의 개조’ 19568월 전원회의 사건을 거치면서 급격한 획일적 권력구조를 구축했다.

물론 외부의 위험이 강력하다고 반드시 내부가 획일적인 세습적 권력구조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당히 열린, 다원화된 출발점을 보였던 북한의 현대사가 결국은 획일화되고 닫힌 사회로 나아간 데는 분명 냉전과 미국의 세계지배라는 세계사와 따로 놓고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에서 지금의 미국처럼 소련이 전세계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면, 북한이 굳이 폐쇄적일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북한은 고작 60년 전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열린 사회였다. 그런 북한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이 폐쇄적인 세습국가로 현재 남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북한이라는 상대방의 행동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에서 명확히 강조했듯이, 북한의 체제 형성 과정에서 존재했던 다양한 면모들은 여전히 잠재되어있을지 모르며 필요에 따라 겉으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롤 모델을 지지하는 한국의 새로운 정치현상




[이택광의 왜?]낯선 정치의 귀환


바야흐로 정치가 다시 귀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치도 모르던 철부지 20대가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성공적 삶을 살아왔던 40대가 집권 여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중간에 끼여서 이리저리 치였던 30대도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민세력으로 급성장하는 중이다.

예전에 보기 힘들었던 정치 패러디물이 넘쳐나고,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는 현직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대한 조롱과 풍자로 가득 찼다. 정치를 혐오했던 대중이 하루아침에 정치를 사랑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곳곳에서 돌아온 정치의 모습에 감격하는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몇몇 회의주의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도대체 정치가 돌아왔다는데, 왜 김진숙은 아직도 크레인에서 300일을 넘게 보내고 있으며, 집권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 왜 야당들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인지, 사뭇 불편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시민이 지지해서 만들어낸 서울시장이라고 하지만, 혼자서 모든 현안을 다 책임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두고 바뀔 수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돌아왔다는 정치는 낯설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이것은 그동안 알고 있던 그 정치가 아니다.

시민후보의 출현 자체가 한국 사회를 지탱해왔던 보수주의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위기는 지난 대선 때부터 잠복해 있었지만, 누구도 여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번 보궐선거에서 목격한 낯선 정치의 모습이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분명 정권심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결과의 수혜자가 야권단일후보를 배출한 야당과 시민단체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당정치가 정치적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하지 못하는 현재 국면은 한국의 정치 판세를 더욱 예측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여당에 대한 반발투표가 이루어졌지만, 이런 표심이 그 반대편에 있는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는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를 직접 호명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이 바로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자기계발의 논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을 통해 도입된 자기계발의 논리는 사회의 기업화와 맞물려서 새로운 도덕의 원리로 자리를 잡았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개인의 성공을 도모하는 이런 삶의 방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무엇보다도 욕망의 대상이 국가나 공동체였다가 가족과 나로 좁혀진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이것을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이다.

소셜네트워크는 이렇게 바뀐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극장이다. 여당이 시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에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라고 ‘지시’했다지만, 자기 자신을 재현해야 하는 것이 소셜네트워크의 본성이다. 언제나 대중의 요구를 재현하는 존재로 몫을 부여받은 정치인이 소셜네트워크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정치인은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정치인보다도, 자신이 따라 배울 수 있는 롤 모델을 지지하는 이런 현상이야말로 향후 한국 사회를 뒤흔들 낯선 정치의 실체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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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현상이 새로운 정치와 투표현상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다. 흥미롭다.

왜 ‘청춘’은 아프고 위로받아야 할까? 글쓰기_인문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쌤앤파커스 2010.


왜 ‘청춘’은 아프고 위로받아야 할까?

우연히 학내 게시판인 <스누라이프>에서 김난도 책에 대한 논쟁이 제기된 걸 보았다. 작성자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녹아낸 연설을 언급하면서, 김난도 ‘책’을 읽었을 때의 공허함의 이유를 잡스의 개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난 명연설을 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는 논지의 글이었다. 이 글에 무수한 댓글이 달렸는데, 어떤 이는 책에서 보여지는 김난도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이미지는 수업과 책에서만 보이는 것일 뿐 실제 대학교수로서의 성품은 이와 멀다며 ‘인신공격성’ 댓글이 달리기까지 한 반면, 어떤 이는 서울대생들은 인기있는 누군가를 존경하지 못하고 ‘비판’만 일삼는다며 따스한 저자의 격려가 왜 이렇게 여기서 비판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박도 있었다.

또한 우연히 수업시간에 요즘은 청춘이 돈이 되는 세상이며, 왜 청춘은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짧은 논평은 더욱더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사실 베스트셀러를 손에 잡았다가 허망하고 뻔한 내용에 실망을 수차례 해본 경험이 있어 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올해 상반기에 가장 잘 팔린 책 중 하나이며 출판사의 광고문구대가 정확할지는 모르지만 작년 12월에 출간되어 “한국출판사상 최단기 100만부 돌파했으며, 중국·일본·이탈리아 등 7개국에까지 수출하는 책으로 올해 한국에서 ‘청춘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하니 분면 2011년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하여 읽기로 결심했다.

책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도서관에서 대출하고자 하여도 이미 모두 예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예약이 밀려 있어서 결국 도서관에 전시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읽은 듯 책은 너덜너덜해진 저자 기증도서를 읽었다. 놀랍게도 도서관에서 1시간 만에 다 읽을 정도로 매우 흡입력있게 읽혔을 뿐 아니라, 진솔한 자신의 삶과 20대가 되어가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로서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책이었다. 특히 취업을 위한 테그닉을 자세히 서술하며 성공을 위한 처세술을 강조하는 기존의 ‘자기계발서’를 비판할 뿐 아니라 안정적인 공기업이나 초봉이 높은 직업에만 현혹되지 말고 “일을 하는 즐거움을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하라”(59면)는 따끔한 충고 또한 잊지 않는다. 청춘을 ‘투자 동아리’ 같은 데 들어가서 벌써부터 재테크에 빠지지 말 것이며, 자신의 눈동자에 답이 있다며 원하는 것을 찾아 치열하게 노력하기를 조언한다. 이렇게 “너무 영리하게 코앞에 있는 단 1%의 이익을 좇는 트레이더가 아니라, 자신의 열정에 가능성을 묻어놓고 우직하게 기다릴 줄 아는 투자가였으면 좋겠다”(11면)며 기존의 맹목적인 자기계발서와 분명한 거리를 둔다.

물론 저자 스스로 머리말에서 지적하듯이, 20대 중 대학생에 특화된 설명이 있고 더군다나 대기업과 고시를 선택할 정도의 ‘여유’를 지닌 한국내 소수 상위 학벌에만 한정된 조언이라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열정을 위해 힘든 생활도 이겨내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역경이라는 것이, 미국유학생활에서 학비를 조달하는 데 다행히 그곳에서도 ‘과외’가 가능했던 자신의 특권이 꽤 ‘자연스럽게’ 서술되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책의 결론은 결국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스펙이 아니라 확실한 자기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며 재테크보다 자신의 열정에 집중하라는 조언이 결국은 “그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더욱 치열해진 청년실업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어쩌면 또다른 더욱 강력한 ‘스펙’을 갖출 것을 제안한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기존의 돈에만 몰두하라는 물신주의적 ‘자기계발서’의 직설보다는 더욱 세련되었고 감성적이며 현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비로소 성공이 다가올 수 있다는 주장까지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대중소설도 아닌 에쎄이가 출간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최단기간에 100만부가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여기의 20대는 외롭고 이 책에서 나름의 ‘위로’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20대들이 고립되어 있고,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이러한 따뜻한 에쎄이가 올해 한국사회를 휩쓴 것은 바로 ‘인생 앞에 홀로 선’ 20대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반성을 촉구하며, 더욱 따스한 눈빛으로 20대를 보듬어주기를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글을 끝내기에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렇게 20대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준 저자의 ‘선의’를 추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왜 자꾸 20대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20대는 이렇게 위로받아야 하는 ‘청춘’이 되었을까? 사실 한국사에서 젊은이는 ‘청춘(靑春)’이기에 앞서 ‘청년(靑年)’이었다.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푸르른 봄날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청춘이거나 자아의 봄날을 뜻하는 개인적 의미의 청춘으로 ‘젊은세대’가 호명되기보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변화의 주체로서 ‘청년’은 존재했었다. 3.1운동 때의 중고생과 4.19와 6.10항쟁 때 민주주의를 위해 변혁의 맨 앞에 섰던 존재가 바로 대학생 혹은 청년이었다. 이들은 세대로서 존재했으며 그 세대들이 지금의 386세대 지금은 486세대인 것이다. 이렇게 시대를 바꾸어온 변혁의 주체들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70~80년대는 한국경제가 성장기였기 때문에 취업의 걱정이 부재했으며 대학생 간의 지금같은 치열한 스펙경쟁이 불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학생들은 청년이라는 세대적 응집력을 가지고 세계를 항해 몸을 던졌고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세상을 바꿔나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은 인생 앞에 홀로 선 고독한 청춘이 되어버렸다. 기성세대는 청춘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한국사회의 ‘주인’이 되었고 대학생들은 그들의 위로와 관심을 목매여 바라는 ‘애완동물’이 되어버렸다. 애견숍의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공간에 진열된 조그마한 강아지들처럼. 마치 자신을 ‘선택’해달라는 듯이 투명한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미래의 주인’을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던진다. 그들의 따사로운 쓰다듬음에 애완견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애완숍의 조그마한 진열장에 청춘들은 각각 갇혀 고독하게 주인의 선택과 위로를 기대한다. 그들은 옆방의 같은 청춘들을 바라보지 못하며 ‘연대’하여 이 애견숍을 탈출한 꿈을 꾸지도 못한다.

그렇게 이제까지 변혁의 주체이던 청년은 애견숍에 진열된 외로운 ‘청춘’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청춘들이 위로받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지금보다, 연대하여 ‘짱돌’을 세상을 날리라는 메시지를 던진 우석훈의 『88만원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몇년 전이 그리워지는 쓸쓸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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