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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라는 구조적 폭력을 파헤치다 글쓰기_인문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저자가 한국현대사 연구자이고 남북문제를 전공한 학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분단’을 주제로 했다는 것에는 별다른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웬 ‘히스테리’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자가 전공을 넘어 ‘정신분석학’까지 공부를 확장했나 하는 기대로 펼쳤지만 책 제목에까지 박힌 히스테리라는 단어는 일상어의 맥락에서 사용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책 제목으로 끌어올릴 정도의 중요한 개념이었다면 ‘히스테리’에 대한 배경지식을 저자가 조금이나마 찾아봤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한국현대사라는 학문영역 내에서 충실히 분단체제의 작동방식을 밝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신분석학적 히스테리라는 개념의 의미까지 육박해들어갔음을 느꼈을 때 책을 읽는 마지막은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할 정도의 ‘읽는 (불)쾌락’을 내게 선사했다.

좀 찾아보니 정신분석학 자체가 히스테리의 치료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자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과 억압, 신경증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당시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던 히스테리자들을 “단순한 관찰이나 분류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당한 메씨지를 무의식 속에 담고 있는 고통받는 주체”로서 재규정하고, “이러한 히스테리자의 고통스러운 메씨지를 듣고 이에 대해 응답하려” 노력했고 그것이 현재의 정신분석학의 출발이었다고 한다(김상환·홍준기 2002).

물론 분단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은 아니지만, 남북분단과 38선을 마주한 북한이라는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인들에게 글로벌한 세계로 나아가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데 여러 ‘불편함’을 안겨주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제 통일을 해야 할 한민족이 아니라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데 뜬금없이 “핵무기 개발” “연평도 포격” 등 한반도 안보를 요동치게 하여 결국 한국의 국가경제 신용도를 낮추는 이해불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한반도의 분단은 한국인과 연구자 사이에서도 이제는 저 낡은 민족주의의 유산이거나 도약하는 한국인의 발목을 잡는 성가신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마치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자의 고통스러운 메씨지를 듣고 이에 응답하려” 노력했듯이, 저자는 분단체제라는 히스테리자가 호소하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얼핏 보기에 비논리적·모순적이라 보이는 것들을 이해가능한 명쾌한 논리로 다시 들려준다.

저자는 분단이 1948년 남과 북의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면서 현실화됐지만, 분단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은 1960년대 말에 형성되어 1970년대에 고착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책은 1945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현대사를 시야에 두면서도 특히 “1968년 1·21사태에서 시작되어 1976년 판문점 도끼살해 사건”인 약 10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10여년간 분단체제는 분단체제의 내재화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분단체제의 주요 당사자인 남과 북, 미국과 중국의 국가권력은 각자 국내외 일정한 정책논리를 형성했다.

1947년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한반도 문제는 국제화되었다. 이후 6.25전쟁은 유엔이 참전함으로써 더욱더 한국문제는 국제화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한반도의 두 국가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극명한 전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고할 것만 같던 냉전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68년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68혁명이 뜨거웠고 중국 또한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지지부진으로 국내정권이 불안하던 상황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1971년 7월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했고 이후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미국과 중국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만들어낸 냉전의 국제적 해빙을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한반도문제를 유엔이라는 국제적 차원에서 해결하기를 꺼려했다. 즉 한반도 분단체제의 법적 구조인 정전협정의 두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로 인해 다시 냉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러한 데땅뜨의 분위기는 이제 분단체제의 내재화를 낳았다. 왜 세계는 탈냉전의 분위기인데 냉전의 산물인 6.25전쟁의 결과물인 한반도 분단체제는 해소되지 못하고 ‘내재화’되었을까. 왜 정전(휴전)에 기반한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평화체제’로 바뀌지 못한 것일까? 이 괴이한 결과의 원인을 저자는 미중과 남북이라는 강대국 논리와 남북의 체제경쟁(집권욕망) 논리가 맞아떨어진 데서 찾는다.

우선 미국과 중국의 정책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체제의 법적 기원인 휴전협정의 성격을 짚고 넘어가자. 휴전(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막연하게 말 뜻 그대로 휴전은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전쟁의 연속인 반면 평화는 그게 아니라 전쟁이 완료되고 평화가 도래한 상태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물론 이 말이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저자가 강조하듯이 휴전협정은 ‘사령관’끼리 서명한 것인 반면 평화협정은 ‘국가와 국가’ 간에 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작 서명자가 다른 것이 무슨 큰 의미를 지니냐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평화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넘어 “평화협정은 전쟁의 당사국들이 전쟁의 종결을 확인하면서 향후 평화유지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협정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려면 미국은 북한을 국가적 실체로 인정해야 하고 이에 따라 실질적인 협상 파트너로 북한을 인정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6.25전쟁의 휴전은 실질적인 평화협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을 실체적 국가로 인정하여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하기보다 남과 북이 그대로 정전상태를 유지하는 ‘한반도 현상유지’ 정책을 6.25전쟁 이후 변함없이 추구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미국과 중국은 모두 현상유지 정책을 고집했을까? 저자는 미국과 중국의 현상유지정책의 이면에는 대국(大國)이 약소국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의도가 숨어있음을 밝혀낸다. 이 숨은 의도를 밝혀내는 저자의 통찰력은 미국의 방대한 1차사료를 읽으면서 정책자료가 말하는 레토릭에 빠지지 않고 그 정책수사 이면에 존재하는 의도를 꿰뚫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정책자료에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않겠다는 입장을 계속 천명하지만 실제 행동의 차원에서 미국은 한국이 과도하게 현상유지를 깨뜨리려고 하면 그것을 저지하려 했고, 너무 한반도가 격렬해지는 것도 제어하려 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유지되는 상황이라는 것이 정전협정에 기반했다는 데서 극명히 드러나듯이 전쟁이 종결된 것이 아닌 전쟁 직전의 상황인 것이다. 즉 현상유지라는 말은 한반도의 위기와 불안을 영속화하는 즉 현상유지라기보다 불안유지라는 말이 한반도의 상황을 더 적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이른바 ‘불안유지정책’ 고수함에 따라 남과 북은 그 불안을 감내하기 위해 강대국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불안유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약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라는 구조가 낳은 불안은 단순히 국가외교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한반도 주민의 삶에도 ‘구조적 폭력’을 야기했다. 1970년대 분단체제의 내재화로 인해 분단이 한반도 차원으로 한정되다보니 자연스레 남과 북의 주체적인 노력이 요구됐다. 왜냐하면 냉전이 강고하던 시절 ‘냉전적 안보이익’을 향유하던 남과 북은 이제 믿을 만한 ‘맏형’이 사라진 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0년대 박정희와 김일성은 ‘자주화’를 내세우며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해나갔다. 그것이 바로 북한은 주체사상이며 남한은 유신체제였다. 물론 1970년대 초는 세계적 평화분위기에 따라 남북이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냉전까지 녹여낼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남북의 주류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화·공고화하기 위한 체제경쟁으로 치달았고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의 이데올로기 차원의 대결로 ‘표명’됐지만 결국 그 안에 살아가는 한반도 주민들은 그 체제 하에서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남북 집권자들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위기와 불안을 극대화하면서 각자 체제가 지닌 문제점을 은폐하거나 합리화했다.

분단체제 같은 구조적 폭력 혹은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 비해 잘 가시화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구조적 폭력의 결과에 둔감하기 십상이다. 지젝은 폭력을 사악한 개인과 억압적 공권력 광신적 군중 등이 만들어내는 가시적인 폭력보다 더 잔혹하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비가시적으로 더 과격하고 가장 순수한 형태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무한 자기증식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조건에 내재되어 있는 ‘초객관적’ 혹은 구조적 폭력으로서, 이는 노숙인에서 실업자 등과 같이 배재됐거나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낸다.”(지젝 2011, 41쪽) 따라서 지젝에게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같은 최고경영자들이 자선사업을 벌이고 공공복지를 위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당면한 자본주의의 축적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좌파적 입장에서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그는 그들이 성공한 기업이 되기까지 저지른 무자비한 이윤추구 과정을 꼬집는다. 즉 지젝에게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일 뿐이다.

이처럼 실제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는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성을 띠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책임소재가 불명확하다(지젝 2011, 40쪽).” 마찬가지로 분단체제도 책임소재가 불명확한 구조적 폭력의 일종이다. 즉 저자 또한 분단체제는 “항상 변덕스럽고 유동적인 상황이 조성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대국의 갈등이 남북한에 교묘하게 이전되고 증폭되면, 갈등의 해결을 서로 미루면서 방치하고, 권력의 무책임성과 식민성을 조장하는 행태”를 반복적으로 낳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무책임성과 식민성은 남북한 내부 정치체제를 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방향으로 추동하며 따라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반도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자결권을 확보하지도 민주적 사회를 꿈꾸기 어렵다.

자본주의체제와 마찬가지로 분단체제는 거대한 히스테리를 낳는 구조적 폭력이다. 거대한 폭력임에도 잘 보이지 않고 인식하기 어렵지만 분단체제는 한반도 주민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문제투성이인 “일민족 일국가를 추구하는 민족주의” 때문에 우리가 한반도 통합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한반도 주민의 삶을 위해 “남북 분리보다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서 구조적 폭력을 지탱하는 한반도 현상(불안)유지정책을 해체하기 위해 남북대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5.

지젝 지음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2011.


분단의 히스테리 - 10점
홍석률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영국대학생들의 저항 사례


마이클 베일리.데스 프리드먼 엮음,
 민영진 옮김/시드페이퍼


  대학은 비판적 사고와 독립적인 학습과 창의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공간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시장논리에 따라 재편되어 한국대학의 교육은 “더 이상 중요한 공공 자원이나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일개 상품이 되었”다는 비판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대학이” “고용자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경쟁적으로 공급하는 곳이 될 것인지, 기업 연구의 부속품이 될 것인지,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 받은 학생들이 최종 교육을 받는 곳으로 될 것인지, 아니면 학생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독립적이고 비판적이며 현실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한국어판 서문).

2011년 반값 등록금 문제와 서울대 법인화 반대 시위 등 다양한 학생운동이 있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시기 등록금 인상과 연구 보조금 삭감 등을 둘러싸고 학생들의 대학 점령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자본에 잠식된 한국 대학들을 바꾸기 위한 실마리를 영국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영국의 대학시위는 전국적으로 펼쳐졌으며 각 대학을 실제 점령했다. 특히 단지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대학 내 노동조합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위를 통해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단지 학내의 운동을 넘어 매장과 광장에서 플래시몹을 하거나 복잡한 기차역에서 강연을 열어 대중들과 함께 운동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물론 그 결과 대학등록금 폐지 등 실질적인 요구조건이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 채 점령운동은 마무리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국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며 또 다른 저항법을 고민하며 모색 중이었다.

『대학에 저항하라』에는 영국의 대학과 정부에 보내는 성명서가 실려 있다. 우리가 대학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생활보조금을 부활시키고 등록금을 폐지한다. 등록금은 법인세 증세와 고소득자의 소득세 증세로 충당한다.”

“전국학생설문조사를 비롯하여 고객 만족도와 품질 관리를 평가하는 제도들을 폐지하고, 수업과 학습에 대한 신중한 피드백으로 대체한다.”

“시간 강사를 고용하지 않으며, 강사가 2년 연속 근무한 후에는 영구 계약한다.”

구내식당, 청소, 국제학생 모집, 병가 보고 등 대학 내 서비스를 가능한 한 아웃소싱하지 않는다. 아웃소싱이 불가피한 경우, 노동조합이 있고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회사를 선정한다.”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개인 또는 정권의 기부금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 ‘기부 국가’의 학자들과 연구자들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교육하고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성명서에서 제시된 것처럼 대학은 계급재생산의 수단이 아니라 돈 없는 사람도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학내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하며 학문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한국 대학도 동일하게 추구해야 하는 목표일 것이다.

오늘(5월 30일) 서울대에서 학생총회가 열린다고 한다. 법인화와 학교 운영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룬다고 한다. 총회가 반드시 성사되어 서울대생들이 등록금과 학문적 자율성 보장 등에 힘을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서 밥값차별화 정책에 대한 비판과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들렸으면 한다. 자신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는 타자의 힘겨운 삶에 공감하는 서울대생들의 자성의 목소리도 학생총회에서 울려 퍼지길 바란다.


‘밥값차별’에서 대학의 몰락을 읽다 밑줄과 줄밑_인문

대학의 몰락 - 10점
서보명 지음/동연(와이미디어)


  사실, 충격적이었다. 작년(2011년) 겨울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어느 학생의 글과 이에 달린 댓글은 내게 충격이었다. 서울대 식당이 외부인으로 넘쳐나, 정작 점심 때 줄을 서야 하는 불편함 등을 토로하는 글이었다. 그렇지. 사실 나도 불편했다. 밥 먹으러 갔는데 외부 견학생들이 떼지어 줄을 서 있는 바람에 먹고 싶은 메뉴 대신 빨리 먹을 수 있는 1700원 짜리 밥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렇다 누군가는 줄 서는 불편함을 느껴 밥값을 외부인에게 더 올리거나 외부인의 식당 이용시간을 제한하자는 불만 제기를 할 수 있다.

이런 불만에 많은 이들이 반박을 가하리라 기대하고 댓글을 읽었는데, 100여개의 댓글 중 두세 개 만이 반박하는 것이었다(댓글이 많았는데 정말 100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부분은 글쓴이의 주장에 “옳소”였다. 물론 스누라이프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서울대생 전부를 대표하지 않을지 모른다. 혹은 모두 외부인의 식당 이용에 불만이 정말 쌓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는 서울대 식당의 ‘기사 식당화’라는 불만에 분노하리라  기대했었는데 그런데 그런 반응은 거의 없어서 슬펐다. 

  왜 택시기사들이 왜 굳이 서울대 식당을 이용해야만 했을까? 하루 사납금도 채우기 힘든 팍팍한 택시기사 생활의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왜 그들의 삶의 애환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서울대생은 무엇이 그리 바쁘길래 식당에서 줄 서는 시간까지 아까우며 그 시간을 외부인에게 빼앗긴다는 사실에 불만일까? 이런 학생들의 불만이 대학본부에 전달됐는지 아니면 국립대라는 거추장스러운 명예를 벗어버린 서울대 법인화의 결과인지 모르지만, 결국 밥값은 2012년부터 외부인에게 더 비싸다. 서울대의 밥값 차별화 정책은 별다른 반대 없이 그대로 시행 중이다. 혹시나 학내에서 밥값 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저항은 부재했다.

타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일차적으로 타자의 삶에 친숙해야 한다. 경제성장기와 중산층이 성장하던 1970~80년대까지 많은 서울대생의 부모님은 중산층 이하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이후 서울대 신입생은 급속히 부유층의 차지가 되었다. 따라서 택시기사처럼 힘겨운 노동자가 자신의 부모님이거나 친척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결국 서울대생은 자신의 시간 30분을 식당 줄에서 허비하는 것이 생계를 위해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택시기사들의 생존을 위한 식당이용보다 더 아까울 것이다.

어쩌면 부유해진 서울대생 개인의 문제만도 아닐지 모른다. 저 거대한 대학의 기업화·시장화라는 구조적 변화가 대학생들의 ‘공감(共感)력’을 뺏어버렸을 수 있다. 서울대라는 학벌이 더 이상 좋은 직장을 백퍼센트 보장하지 못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이제 서울대생들도 과거 선배들처럼 핍박받는 노동자를 위해 공장에 잠입하거나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 시위에 나갈 ‘여유’가 없다.

결국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제 바뀌었다. 대학은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공공적 성격을 지닌 공간이 아니라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직업양성소가 되어버렸다. 기업로고가 박힌 건물들이 대학을 점령했으며 그곳의 학생들은 기업이라는 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의 스펙을 채우기에 여념 없다. “자본주의의 영역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침투하면서, 또 대학의 지향점이 학문과 인간에 대한 이상과 비판 정신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해버렸다(258쪽).

자본에 점령된 대학을 ‘몰락’했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대학은 중세에 설립된 이후로 언제나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12세기경 왕족은 행정기술자를 원했고 이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회에 딸린 학교를 설립했다. 점차 대중적 교육열은 높아졌고 선생들은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합을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유니벌시타스(Universitas)의 첫 등장이었다. 초기에 세속권력인 국가는 대학에 간섭하고자 했으나 교황은 대학의 행정이나 학사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게 차단했다. 그런데 교황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지역 관료나 세속 왕권의 간섭에서 보호했지만 교황으로부터 독립되지는 못했다(65~81쪽).

이후 근대가 도래하면서 국가는 대학을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지배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지역학이 대학에서 발달했으며 국가에 필요한 관료와 연구자들이 대학에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대학의 국가 종속적 역할을 비판하며 학문의 자율성과 국가 비판적 자세를 강조하는 움직임 또한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칸트는 이성의 자율성에 따른 철학이 중심이 되는 대학을 꿈꾸었으며 1968년 대학생들은 대학의 권위주의와 반전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대학의 자본화·시장화는 대학의 자율성과 비판정신을 약화시키는 위기였다. 대학의 위기는 대학이 설립된 중세 때부터 항상 존재했다. 대학 위기의 역사를 잘 정리해준 책이 바로 『대학의 몰락』이다. 그런데 이 책은 대학의 위기와 몰락의 연원을 살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자본에 잠식되어가는 대학을, 대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 대안은 다음의 책 『대학에 저항하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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